지난 8월 25일,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학술회의 “변경과 ‘경계’의 동아시아사”가 개최되었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지금까지 변경사(border history) 관련 학술회의를 두 차례 개최한 바 있다. 즉, 지난 2004년에 <근대의 국경
역사의 변경>, 2015년에
<제국과 변경>을 개최하여, 그 성과를
각각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기존의 사업성과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변경사의 가능성을 한층 촘촘하게 모색함으로써, ‘불순물’을
허용치 않는 ‘위대한 국사’ 담론에 대항하는 공존의 역사학을 그려나간다는 것이 본 학술회의의 취지였다.
학술회의는 5편의 연구발표와
토론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김보광은 고려전기(무신정권기를
포함)를 검토대상으로 삼아 탐라에 대한 고려왕조의 인식과 지배방식을 추적했다. 김보광은
애초에 ‘외국’으로 인지되었던 탐라가 11세기에 접어들어 ‘번토’로 자리매김되었으며, 이후 문종대를
거치며 명실상부한 군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요근은 고려의 북쪽 변경과 남쪽 변경의 차별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비판하는 한편, 보다 세밀한
용어사용과 사료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승훈은
영국해군문서 등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삼도=거문도가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하였다. 한승훈은
거문도라는 지역 자체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전제로, 특히 영국해군과
거문도 주민들의 접촉에 주목하여 그 구체적인 양상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에 대해 송기중은 ‘부드러운 근대’에 대한 저자의 명확한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고 비판하는 한편, 호적과 관련된 데이터에는 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이세연은 17세기 일본의
북쪽 변경에서 생산된 『新羅之記録』라는 연대기를 분석하여 변경의 심성을 밝히고자 했다. 이세연은
『新羅之記録』에 중앙과 지역을 아울러 바라보는 경계인의 감각이 내재되어 있으며, 아울러 변경이라는
특수성에서 비롯된 독특한 망탈리테도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배관문은 중세 무사들의 전투방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실용과 생존을
우선시하는 마쓰마에 가문의 무사도를 변경 고유의 무사도로 규정하기는 어렵다고 비판했다.
정면은 『白族社会歴史調査』, 『白族簡史』에
대한 분석으로 중심으로 ‘백족’의 탄생과정을 사학사적 관점에서 규명하고자 했다. 정면은 “누가
‘백족’을 만들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특히 洱海 지역의 대성(엘리트), 土官・土司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이선애는 민족(nationality)과 종족(ethnic group)이라는 용어의 함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제국들의 공통점뿐만 아니라 각각의 제국이 지니고 있는 차별성에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비판했다.
박혜정은
청 제국의 북부 스텝 변경지대에만 주목해 온 연구동향에 대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북부 스텝과
더불어 동남 해안의 변경에서도 청 제국을 조망하고자 했다. 박혜정은 서구학계의 변경 관련 연구를 망라적으로 검토하여, 제국의 장기지속이라는
관점에서 청 제국의 변경정책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했다. 이에 대해 채준형은 퍼듀의 연구에서 촉발된 저자의 논의가 결국은 페어뱅크의 테제로 회귀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한편, 저자가 구상하고 있는 ‘근대적이고 혁신적인 면모’가 어떤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종합토론의
좌장을 맡은 윤해동도 지적했지만, 이번 학술회의에는 애초에 변경사에 대한 공통의 문제의식 외에 구심점이 될 만한 구체적인
주제와 키워드가 없었다. 말하자면, 발표자와 토론자 상호 간에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질 만한 기반이
사전에 마련되지 못한 셈이다. 이 사실은 한국학계에서 변경사가 처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한국학계에서
변경사에 대한 열기는 동북공정의 등장과 더불어 부풀어 올랐고, 동북공정의 종료와 더불어 사그라진 감이 없지 않다. 학문에도
유행이 있다. 시시각각 등장하는 최첨단의 이론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한국학계의
회전속도는 지나치게 빠른 것이 아닐까, 때로 우려스럽기도 하다. 소화는 제대로
된 것인지, 간과되었던 점은 없는지, 누군가는
진득하게 버티고 요모조모 따져보아야 한다. 한국, 동아시아의 역사현실에 맞게 어떻게 다듬고 기름을 칠지, 때로는 아둔한
긴 호흡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빛바랜 사진 같았을 학술회의를 바라본 소회이다.
작성자: 이세연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