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김흥규의 <근대의 특권화를 넘어서>
윤해동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근대의 특권화를 넘어서>(김흥규 지음, 창비 펴냄)는 한국의 '민족주의'와 '근대'의 성격 혹은 그 이해방식을 둘러싼 매우 '논쟁적'이고 '의욕적'인 저작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우선 이 책은 기왕에 발표된 5편의 논문과 이를 종합하는 새로운 논문 1편을 합쳐 모두 6편의 글을 묶은 것이다. 그런데 기왕에 발표된 5편의 논문이 모두 어떤 저자 혹은 논문에 대한 이른바 실명 비판 혹은 반비판이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대단히 '논쟁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식민지 근대성론과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이중비판'이라는 부제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저자는 기왕의 '내재적 발전론의 실효를 선언'하고 주류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단층적 근대성론의 대안적 의의 또한 부인'하면서, '한국문화 연구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자 한다.(책머리) 이런 점에서 대단히 '의욕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저작이라 해도 좋다. 요컨대 이 저작은 '한국문화 연구의 대안적인 틀'이라는 '의욕적'인 '내용'을 매우 '논쟁적'인 '형식' 속에 담은, 웅대한 포부를 가진 저작으로 보인다. 하물며 이미 대학을 정년퇴직한 뒤 '명예교수'로 있는 저자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 포부는 더욱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논쟁적인 저작에 대한 비평의 형식은 과연 어떠해야 할 것인가? 평자는 저자가 비판하는 논진의 한 축을 구성하는 인물로 이 저작 속에서 언급된바 있다.(137쪽) 그럼에도 평자 스스로 이 저작이 구성하고 있는 논쟁 속으로 발을 들여놓거나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의 목표는 <근대의 특권화를 넘어서>의 인식론적 배경과 방법론적 틀에 대한 비평을 수행하는 데 있음을 먼저 분명히 해둔다.
저자가 비판하는 담론의 중심은 '탈민족주의론'과 '식민지 근대성론' 혹은 그 결합태로서의 '단층적 근대성론'(때때로 '단절적 근대주의'로 표현되기도 한다)이다.(책머리) 이 저작은 민족주의와 근대성을 둘러싼 두 가지 이론의 비판을 통하여 자신의 논리를 구성하고 있으므로, 이 책에 대한 비평 역시 그 담론 비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이제 위 두 가지 비판담론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저자는 한국의 탈민족주의 담론이 원초주의(primordialism)와 근대주의(modernism)라는 이분법을 전제한 위에서, 민족정체성의 형성을 근대세계의 요인만으로 설명하는 '단절적 근대주의'(69쪽)에 입각해 있다고 비판한다. 한편 근래에 이 날카로운 이분법을 비판하고 단절적 근대주의에 대한 건설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는바, 저자가 내세우는 '수정적 구성주의'(187쪽)가 그 대안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수정적 구성주의란 민족을 담론적 구성물이라고 보되, 민족의식의 형성을 앞 시대와 무관한 근대의 발명으로 단순화하는 근대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이처럼 저자의 탈민족주의 담론 비판은 대단히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러나 그 단순명쾌함에 비례하여 모호함도 증폭한다. 우선 근대주의 패러다임과 쌍을 이루는 것이 원초주의 패러다임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대개 영속주의(perennialism) 패러다임이 근대주의와 대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고, 원초주의에 대해서는 도구주의(instrumentalism)적 비판이 유용한 역할을 수행해왔음이 지적되고 있다(<민족주의란 무엇인가>, 앤서니 스미스 지음, 강철구 옮김, 용의숲 펴냄, 81~105쪽). 원초주의와 영속주의가 친연성을 가지고 있으며, 도구주의가 근대주의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원초주의와 근대주의라는 이분법은 뭔가 부자연스럽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단절적 근대주의'란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민족 집단의 집합적·문화적 정체성의 원초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과, 민족형성의 근대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상호 배치되는 주장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탈민족주의도 에트노스(ethnos) 혹은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의 존재를 그저 부정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저자가 내세우는 '수정적 구성주의'라는 것이 원초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이고 근대주의적인 비판이 될 것인바, 저자의 주장과 탈민족주의가 그다지 먼 거리에 있는 것같지는 않다. 탈민족주의가 '구성주의적 근대주의'와 친연성을 가지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앤서니 스미스, 앞의 책)
한편 저자는 '단층적 근대성론'이 근대를 식민 기원(紀元)의 시간으로 규정하고, 식민주의를 전능한 지배력을 가진 것처럼 특권화한다고 비판한다. 곧 식민주의를 통하여 근대는 발생론적으로 특권화된다는 것이다.(191쪽) 이런 식민기원의 시간은 '근대성의 내습과 탄생'을 강조하는 서사에서 잘 드러나는바, 저 경박한 '탄생'과 '발명'으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내습으로 인하여 '과거는 몰수'되어 버린다는 것이다.(222~232쪽) 저자는 민족의 과거가 몰수당함으로써 내재적 발전론이 집착했던 1국사의 시야는 1.5국사(제국+식민지)의 종속적 구도로 환치되었다고 비판한다. 또 이런 인식에는 제국주의-식민주의를 발광체로 놓고 피식민자를 반사체로 가정하는 논법이 공생하고 있다고 한다.(63쪽)
그런데 저자에게 이런 '단층적 근대성론'은 서구의 근대가 '타자의 시간'으로 주어진 데서 오는 인식론적 곤경에서 말미암는 것으로 간주된다.(207~216쪽) 비서구인들에게 주어진 근대의 타자성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대안적 근대성론' 혹은 '다중적 근대성론'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근대성을 회피할 수 없는 전제로 받아들이고 원본과의 종속적 유대를 상기시키는 것으로써, 이런 논리들 역시 제한적인 것으로 비판된다. 이제 '망명정부의 지폐'에 지나지 않는 근대를 괄호 안에 넣고서, 변화를 위한 동인의 내재성을 회복하고 그를 위해 행위자들을 귀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233~240쪽)
이처럼 저자에게 '단층적 근대성론'에 드러나는 '근대주의'는 난폭하다.(책머리) 근대성의 내습으로 과거가 몰수되어버렸다고 보는 저자의 시각은, 근대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전근대와의 단절성을 강조하는 탈민족주의 비판과 매우 유사하다. 또 근대를 타자의 시간이라고 비판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를 발광체와 반사체로 설정하는 저자의 근대를 보는 시각에는 서구와 비서구를 가르는 깊은 단절이 존재하고 있다. 요컨대 '저자가 규정하는' '단층적 근대성론'에는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비서구와 서구 사이의 대상화된 절연이 존재한다. 물론 이 절연은 저자가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새로움'과 '폭력성'을 인정하되 그것이 식민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것임을 수용하게 되면, '근대'는 그 타자성 혹은 대상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세계체제적 '식민지 근대' 규정은 서구의 근대가 식민주의를 강화해왔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성립하는 '장기 16세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존의 세계체제론은 유럽중심주의적 편향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된다. 반면 몽골제국의 유라시아 정복을 강조하는 새로운 시각은 '장기 12세기'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요컨대 서구와 비서구는 횡문화적(transcultral) 교환 속에서 그리고 그를 통한 오랜 상호작용 속에서 성립해왔던 것이다. 대안적 근대성에 대한 이런 새로운 시각이 근대를 둘러싼 깊은 단절 혹은 절연을 넘어설 수 있게 할 것이다.
식민지 근대성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단호하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은 무디거나 변호에 가깝다. '내재적 발전론의 공헌은 높이 평가'하지만 '미래의 생산적 가치는 기대할 바가 별로 없다'고 저자는 강조하지만(책머리), 곳곳에서 그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배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와 발전을 괄호 안에 넣고서 행위자를 귀환시키려는 저자의 의도에서 평자가 읽은 것은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근대를 둘러싼 깊은 단절을 읽는 대신에, 세계체제적 근대 속에서 트랜스컬처럴(혹은 트랜스내셔널)한 교환과 상호작용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시대를 넘어서는 길은 내재적 발전론을 식민지 근대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비판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 속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안타까움을 안으로 삭인 조용한 침묵이야말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최고의 헌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