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과 '유신체제'의 거리 재기
윤해동 |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에 ‘대중독재’론이 제출되어 그 타당성을 둘러싸고 논쟁이 이어진 바 있다. 대중독재론이란, 거칠게 말해 정치적 독재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데에는 대중의 일정한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론이었다. 20세기 좌우파 독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재를 표상하는 강제와 폭력이라는 피상적인 이미지의 물밑에서 작동하는 ‘대중의 자발적 동원메커니즘’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중독재론이 던진 파장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으며, 독재와 민주주의가 대쌍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학계의 단순한 인식에는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였다. 요컨대 민주주의와 대중의 동의가 독재 그리고 파시즘을 유지하는 기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나치즘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크게 ‘의도주의’와 ‘기능주의’ 패러다임이 있다. 의도주의란 나치 지도자 개개인의 의도를 중심으로 나치즘을 설명하는 반면, 기능주의는 나치즘의 작동방식에 주목하는 연구 패러다임이다.
마르틴 브로샤트는 1969년 <히틀러 국가>(Der Staat Hitlers)(문학과지성사)를 저술함으로써 기능주의 연구의 전범을 보였으며, 이후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나치즘 연구를 일상사 연구로 이끈 인물이다.
브로샤트는 1933년 나치혁명이 성공하자 곧바로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종결되었다고 본다. 이어 부상한 것이 지도자권력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38년 이후 사회적 역할을 대리하는 각종 국가기구가 각축하는 다중지배적 상황과 지도자 절대주의의 카리스마적 통제 상황을 차근차근 기술한다. 나치당의 지배가 ‘미친 개’처럼 날뛰게 되는 과정을 끈질기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브로샤트는 다중지배(polykratie)와 지도자 히틀러의 카리스마적 지배, 그리고 나치 이데올로기가 구성하는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나치체제가 수행한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설명한다. 나치당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듯 일사불란한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직은 매우 분권적이었으며, 기능적인 분산성과 정책적 혼란이 일상적으로 야기되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새로운 행정기관과 조직을 만들어서 정부를 우회하고 또 국가를 파괴하였다. 그리하여 국가는 매우 분산적이고 혼란스러웠으며, 상호 갈등하는 사회적 역관계에 의해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다중지배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던 힘은 당과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있던 지도자 곧 히틀러의 카리스마적 지배뿐이었다. 이런 지배방식이 곧 지도자원칙이었으며, 그에 의해 작동하는 국가가 바로 ‘히틀러국가’ 혹은 ‘지도자국가’였다는 것이다.
지난해는 이른바 ‘유신체제’ 20주년이 된 해로서, 유신체제의 성격을 둘러싼 여러 학술회의가 개최된 바 있다. 그런데 유신체제의 강제성과 폭력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거나, 박정희의 개인적 카리스마를 독재로 연결 짓는 연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치즘 연구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의도주의 연구가 중심을 이루었다고 할 것이다. 아마 이른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함으로써, 유신체제 연구가 정치적 성격을 탈피하기 어려웠던 사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제 유신체제 연구에도 기능주의 패러다임을 적극적으로 적용해 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그때에 브로샤트의 이 고전적 연구가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이다. 게다가 한국 학계는 대중독재론이라는 훌륭한 그러나 아직은 정제되지 않은 이론적 시도와 경험을 축적하고 있지 않은가?
‘파시즘과 유신체제의 거리재기’ 작업은 20세기 독재와 민주주의 연구의 한국형 이론 모델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