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서양 시찰보고서’에 드러난 19세기 동아시아
한말·일제시기에 걸쳐 구미인들이 쓴 한국 혹은 동아시아 여행기가 학계의 관심을 넘어 일반 독자들의 주목을 끈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근래에는 한국인이 쓴 동아시아 혹은 세계 여행기가 ‘세계에 대한 이해’라는 차원에서 호기심을 끌고 있는 중이다. 그 여행기들이 가진 오리엔탈리즘적 성격이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를 통해 일국적 차원을 넘어선 상호이해 나아가 상호작용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전근대 시기에도 연행록 혹은 해사록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행기가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연행록은 중국을 다녀온 각종 사절이, 해사록은 일본을 다녀온 ‘조선통신사’가 ‘주로’ 기록한 공식 여행기이다. 이들 여행기가 최근 국제학계의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도,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의 상호이해를 통해 그 역사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희귀한 자료라고 보기 때문이다.
전근대의 공식 여행기와 근대 이후의 개인적 여행기를 잇는 것으로, 19세기 후반 각국의 공식 사절단이 남긴 여러 ‘여행보고서’가 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크게 주목을 받아왔던 것이,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 1~5권(소명출판)이다. 이 자료는 이른바 ‘이와쿠라(岩倉俱視)사절단’의 공식 보고서로서, 나중에 도쿄제국대학과 와세다대학의 사학과 교수를 역임하는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가 집필하였다. 이와쿠라를 단장으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 메이지유신의 최고 지도부가 참가하고 있던 이 대규모 사절단은, 1871년부터 1년10개월 동안 미구지역 12개국을 순방한 뒤 귀국하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메이지 유신 직후 구미 각국의 제도와 문물을 시찰하였던 바, 일본이 근대국가를 만들고 서구적 근대화를 이루려는 노력을 상징하고 있다.
근대화를 향한 이런 일본의 성공적인 시도는 중국의 실패한 노력과 자주 대비된다. 이와쿠라사절단보다 3년여 이른 1868년에 파견된 청국의 해외사절단은 중국 주재 미국공사를 지낸 푸안신(浦安信)을 단장으로 2년10개월 동안 12개국을 방문하고 있다. 하지만 푸안신사절단은 외국인이 단장이었다는 점을 포함하여 공식 시찰보고서도 남기지 않았으며, 근대화에 대한 ‘긴박한 열정이나 고매한 사명감’이 이와쿠라사절단에 비해 현저히 결여되어 있었다고 평가되어 왔다.
두 사절단의 성격 차이가 그 후 중국과 일본이 걸어간 근대화노선의 성공과 실패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진보’에 대한 두 사절단의 관념을 비교해보자. 푸안신사절단에 통역으로 참가했던 장덕이(張德彛)는 나중에 <항해술기>라는 사적인 여행기를 남기고 있는데, 그는 “서양 사람들은 지금이 옛날보다 낫다고 해서 옛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 하면서 서구적 진보관념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이에 비해 구메는 “먼저 깨달은 사람은 그것을 후진에게 전하며 선각자는 후배를 깨닫게 함으로써 점점 진화하는데, 이것을 이름지어서 진보라고 한다”고 하여, 서구의 문명발전단계설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진보관념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지만, 일본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근대화를 전면적으로 추진하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장덕이가 보여주었던 진보관념에 대한 회의를 통해 그가 지녔던 중국적 세계에 대한 확신과 주체성을 확인할 수도 있다. 중국의 헤게모니가 부상하고 있는 지구화시대에 그런 진보에 대한 회의가 서구 중심의 세계관을 대체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데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