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 새로 읽기]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윤해동 |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7월말~8월 초에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중앙아시아' 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더운 날씨에 체력이 고갈되는 바람에 2주가 지난 지금도 고생하고 있지만, 옛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도시인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를 직접 볼 수 있었던 보람은 크게 남았다. 두 도시는 실크로드의 영광을 구현하던 오아시스 경제의 힘을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옛 실크로드를 구성하는 지역은 1991년까지만 해도 소련과 중국이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서쪽과 동쪽을 각기 분점하고 있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실크로드의 서쪽지역은 이른바 '중앙아시아' 5개국으로 분리·독립했고, 동쪽지역은 '신장·위구르자치구'로 중국에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분리·독립운동으로 인해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정정이 아주 불안한 상황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실크로드의 동서 지역을 아우르는 통칭은 '중앙아시아' '내륙아시아' '중앙유라시아'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 이 지역은 19세기 후반에 대두한 세계적 차원의 지정학 논의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역이 됐다. 일찍이 영국의 지정학자 맥킨더는 이 지역을 심장과 같은 '핵심지역(heart land)'이라고 지칭했고, 러시아와 영국이 이 지역을 두고 제국의 명운을 건 '거대게임(great game)'을 벌였던 사실은 유명하다.
14세기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을 이은 차가타이칸국이 붕괴하고 난 뒤,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부상한 세력이 바로티무르(Amir Temur) 제국이었다. 하지만 티무르 제국 역시 유럽에서 '지리상의 발견'이 시작되는 15세기 후반부터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한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부상한 강력한 제국이, 유럽의 상업제국들이 새로운 '동방무역' 노선을 개발하는 것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이 지역은 모스크바공국(후에 러시아)과 청조(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심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차르의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후반에, 청조의 건륭제는 18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 지역을 동서로 분할해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했다.
최근 '중앙아시아' 연구에서 대두한 가장 주요한 논점은, 이 지역 내부에 존재하던 초원 유목민과 오아시스 정주민들의 상호관계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중국과 중동 혹은 유럽을 동서로 연결하는 교류관계 혹은 선으로서의 실크로드만을 연구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중앙(내륙)아시아 연구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은 한문과 같은 외국어 사료가 아니라 현지인들이 남긴 현지어 사료를 중심으로 연구가 수행돼야 한다는 점에 대한 자각이다. 미국의 중국학계를 중심으로 대두한 이른바 신청사(New Ching History) 연구가 바로 이런 연구경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피터 퍼듀의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공원국옮김·길)은 신청사 연구를 대표하는 저작이자, 중국 변경사 연구의 걸작이라 해도 좋다. 이 책은 중앙유라시아(퍼듀의지칭) 지역이 15세기부터 18세기 청조에 정복되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한다.
그의 분석은 중앙유라시아 지역이 유라시아 대륙의 교차로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하는 세계사적 관점에 의해 지지된다. 만주족 왕조인 청조는 그 왕조가 가진 유목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군사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으며, 18세기의 인구 증가와 자원 부족 등을 타개하기 위해 '(군사)식민주의'의 성격을 아울러 가지게 됐다고 주장한다.
바꿔 말하면 18세기 청의 중앙유라시아 정복은 17~18세기의 세계사적 사건과 궤를 같이하면서 청조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내고있다. 이 '만청식민주의(Manchu Colonialism)'는 18세기의 세계사적 동시대성을 일깨운다. 한국사 연구에도 크게 자극이 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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